웹사이트 상위노출 성남시, 내년부터 초등 신입생에 입학준비금 10만원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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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상위노출 성남시가 내년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1학년 신입생에게 입학준비금 10만원을 지원한다.
성남시는 최근 보건복지부와의 사회보장제도 신설에 관한 협의가 완료됨에 따라 이같은 사업을 시행한다고 19일 밝혔다. 폰테크
사업 추진을 위해 성남시는 제305회 성남시의회 임시회에 ‘성남시 초등학교 등 입학준비금 지원 조례’를 제출했다.
입학준비금 10만원은 지역화폐(성남사랑상품권)로 지급한다. 이를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 교육 분야의 공공적 역할 강화 등의 효과가 날 것으로 성남시는 기대하고 있다.
지급 대상은 입학 기준일 현재 성남시에 주민등록이 돼 있고, 초등학교나 교육청 등록 대안교육기관에 1학년으로 입학하는 신입생이다. 내년 성남지역 초등학생 예상 신입생수는 6303명이다.
신상진 성남시장은 학생들의 첫 출발을 응원하고 학부모들의 교육비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입학준비금 지급을 추진하고자 한다면서 준비물 마련 등으로 금전적 부담이 커지는 입학 시기에 이번 실질적 지원을 통해 학생들이 더욱 안정적인 환경에서 첫 학교생활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몇달간 가공식품만 먹고 지내던 시기가 있었다.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의 열량과 영양성분을 측정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에 기록하던 때였다. 멸균 포장된 현미곤약밥, 플라스틱 통 샐러드, 무가당 두유 같은 공장에서 나온 식품들은 칼로리를 계산하기가 손쉬웠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 때는 원재료를 전자저울에 올려놓고 무게를 쟀다.
그렇게 기록한 열량이 하루 1300㎉를 넘기면 밤마다 혼자서 자책했다. 정상체중보다 고작 몇 ㎏ 더 나가는 몸을, 앉으면 접히는 뱃살과 틈 없이 맞닿는 허벅지를 스스로 혐오했다. 한밤중에 배가 고파오면 옷장에서 옷을 마구잡이로 꺼내 입어봤다. 물배라도 채우고 싶었지만 물을 많이 마시면 다음날 공복 몸무게가 늘어날까봐 그조차 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아침마다 체중계에 올라 전날보다 소수점 단위로 줄어든 몸무게를 확인해야 비로소 안심이 됐다.
그렇게 몇달을 지내자 주변 사람들이 칭찬했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냐고, 너무 예쁘다고. 대수롭지 않은 듯 그냥 적당히 먹고 운동했다고 대답하곤 했다.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은 최근 독자와 기자가 함께 콘텐츠를 발굴하는 ‘입주자 프로젝트’의 주제로 ‘섭식장애’를 골랐다. 섭식장애는 정신적 문제로 먹는 행위를 통제하기 어렵게 되는 질병이다. 단순히 마르고 싶은 여자들이 걸리는 병이라고 여겨지곤 하지만, 사실은 정신질환 중 사망률이 가장 높은 축에 들 정도로 위험하다. 여성 환자가 남성보다 열 배가량 많을 정도로 젠더화된 병이기도 하다.
다양한 경로로 케이스를 수집하며 이런 경험이 너무나도 보편적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남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평소보다 훨씬 덜 먹고 혼자 있을 때 폭식과 구토를 반복한다든지, 특정한 체중에 집착하다 영양실조에 이르렀다든지… 섭식장애까지는 아니지만 체중과 체형에 대한 집착을 포함한 ‘이상섭식’을 겪는 여성들은 너무 많다. 아니 많을 수밖에 없다. 미디어에는 끊임없이 깡마른 여성의 몸이 전시되고 옷가게에는 마른 몸이 아니고서는 입을 수가 없는 ‘프리사이즈’ 옷이 널려 있다.
날씬한 몸매와 어려 보이는 외모를 갖추도록 요구하는 사회적 통제 속에서 여성들은 보편적으로 자기 신체에 대한 수치심을 느끼며 이상섭식을 겪는다. 하지만 섭식장애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은 너무 빈약하다. 섭식장애를 겪는 여성들은 흔히 ‘외모에만 집착하는 멍청한 여자애’라는 비난을 받는다. 거식증 경험을 기반으로 한 책 <삼키기 연습>을 썼고, 플랫에 섭식장애 프로젝트를 제안한 박지니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이 수십년간 섭식장애에 대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는 배경에는 가부장적, 여성혐오 문화가 있다. 섭식장애를 겪는 젊은 여성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요즘은 비만치료제 위고비 열풍이 분다. BMI 30 이상 환자에게만 처방이 허가돼 있지만 ‘위고비 성지’라고 불리는 일부 병원은 신체 계측도, 문진도 없이 위고비를 처방한다고 한다. 정상체중인 사람이 위고비를 사용하면 부작용을 겪을 위험이 더 커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성 비만율은 45.6%, 여성은 27.8%인데 위고비 등 비만치료제 처방 환자 중에서는 71.5%가 여성이다. 게다가 정상체중 여성은 정상체중 남성에 비해 마른 몸을 만들기 위해 위고비를 처방받을 가능성이 더 크다. 비만치료제 시장이 확대되는 만큼 여성에 편중된 위험도 점점 커질 것이다. 그런데도 젠더화된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영국과 프랑스 등은 패션 브랜드들이 지나치게 마른 모델을 쓰는 것을 금지한다. 최근 모델이 너무 말랐다는 이유로 영국에서 퇴출됐다는 한 브랜드의 광고 사진을 보면서, 그보다 더 마른 것 같은 K팝 여성 아이돌들을 떠올렸다. 거식증을 다룬 연극 <마른 여자들> 연습실 한쪽의 화이트보드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고 한다. 절대로 마르지 마시오. 이 연극을 연출한 박주영 연출가는 몸무게 30㎏대 거식증 환자를 연기하는 배우의 몸에 관객이 집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런 원칙을 정했다고 했다. 우리도 그 연습실처럼 안전한 공간을 만들 수는 없을까.
우리는 성공의 언어에 둘러싸여 있다. 더 좋은 직장과 더 넓은 집, 적기의 연애·결혼·출산, 취미·건강을 위한 자기계발이 좋은 인생의 기준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잭 핼버스탬의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2011)은 여기에 브레이크를 건다. 그는 실패(failure)라는 부정적 단어를 낙오가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여는 방식으로 다시 쓰자고 제안한다. 실패를 낙오가 아니라 다른 방향키로 보자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성공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균열을 내고 그 틈에서 다른 삶의 감각을 발견하자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론가로서 핼버스탬이 즐겨 쓰는 재료는 의외로 가벼운 것들이다. 애니메이션, 아동영화, B급 코미디. 그는 이런 텍스트에서 ‘정상적’이거나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궤도를 비켜 나가는 이야기를 발견한다. 성공을 향해 직선적으로 올라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목표 없이 미뤄지고 망설이고 돌아가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장난감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토이 스토리>, 닭들이 농장에서 탈출하는 <치킨 런>, 벌이 집단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꿀벌 대소동> 같은 이야기들은, 단순한 어린이 영화가 아니라 다른 시간, 다른 관계, 다른 질서를 상상하게 만든다. 정답을 향해 질주하는 영웅담이 아니라 삐걱거림을 공유하는 우정의 서사. 핼버스탬은 이런 장르를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고 저급이론(low theory)으로 종합한다. 말 그대로 고급 학문 담론의 반대편에 있는, 일상과 주변부에서 생산되는 사유를 뜻한다.
핼버스탬이 강조하는 ‘실패’는 단순히 좌절이나 무능력이 아니다. 그는 우울, 외로움, 소외, 심지어는 퇴행까지 새로운 방식의 삶을 열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그림자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을 꺼낸다. ‘주체적인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페미니즘과 달리, 자기파괴를 욕망하는 여성, 어머니와의 본질적인 유대를 거부하는 여성, 자유를 버리고 수동적이길 원하는 여성들 역시 대항 서사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지·망각·수동성·마조히즘 같은 태도도 포함된다. 핼버스탬은 이러한 태도가 단순한 패배나 회피가 아니라 다른 삶의 계보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시도라고 읽는다.
하지만 이 논의에는 몇가지 한계도 있다. 첫째, 실패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자원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실패는 선택일 수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가난, 인종차별, 장애 같은 조건 때문에 강요된 결과일 수 있다. 둘째, 실패가 퀴어나 여성의 정체성에 고정적으로 붙는 순간, 오히려 원래 실패하는 존재라는 오래된 낙인을 되풀이할 위험이 있다. 즉 실패가 특정한 정체성을 정의하는 진단적인 명칭이 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 실패를 지나치게 낭만화할 위험이 있다. 어쩌면 실패는 실패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이들만이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간과한다면 실패는 정치적 저항이 아니라 정서적 위안에 머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이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여는 문이라는 것이다. 성공이라는 언어가 하나의 길만을 가리킬 때, 실패는 그 길에서 벗어나 옆으로 나가고, 잠시 멈추고, 돌아가며 또 다른 경로를 열어낸다. 따라서 질문도 달라진다. 실패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실패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로. 실패는 낙오의 표지가 아니다. 오히려 제도의 시간을 흔들고, 그와는 다른 리듬으로 살게 하는 기회다. 바로 이 점에서 실패는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언어이자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성남시는 최근 보건복지부와의 사회보장제도 신설에 관한 협의가 완료됨에 따라 이같은 사업을 시행한다고 19일 밝혔다. 폰테크
사업 추진을 위해 성남시는 제305회 성남시의회 임시회에 ‘성남시 초등학교 등 입학준비금 지원 조례’를 제출했다.
입학준비금 10만원은 지역화폐(성남사랑상품권)로 지급한다. 이를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 교육 분야의 공공적 역할 강화 등의 효과가 날 것으로 성남시는 기대하고 있다.
지급 대상은 입학 기준일 현재 성남시에 주민등록이 돼 있고, 초등학교나 교육청 등록 대안교육기관에 1학년으로 입학하는 신입생이다. 내년 성남지역 초등학생 예상 신입생수는 6303명이다.
신상진 성남시장은 학생들의 첫 출발을 응원하고 학부모들의 교육비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입학준비금 지급을 추진하고자 한다면서 준비물 마련 등으로 금전적 부담이 커지는 입학 시기에 이번 실질적 지원을 통해 학생들이 더욱 안정적인 환경에서 첫 학교생활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몇달간 가공식품만 먹고 지내던 시기가 있었다.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의 열량과 영양성분을 측정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에 기록하던 때였다. 멸균 포장된 현미곤약밥, 플라스틱 통 샐러드, 무가당 두유 같은 공장에서 나온 식품들은 칼로리를 계산하기가 손쉬웠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 때는 원재료를 전자저울에 올려놓고 무게를 쟀다.
그렇게 기록한 열량이 하루 1300㎉를 넘기면 밤마다 혼자서 자책했다. 정상체중보다 고작 몇 ㎏ 더 나가는 몸을, 앉으면 접히는 뱃살과 틈 없이 맞닿는 허벅지를 스스로 혐오했다. 한밤중에 배가 고파오면 옷장에서 옷을 마구잡이로 꺼내 입어봤다. 물배라도 채우고 싶었지만 물을 많이 마시면 다음날 공복 몸무게가 늘어날까봐 그조차 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아침마다 체중계에 올라 전날보다 소수점 단위로 줄어든 몸무게를 확인해야 비로소 안심이 됐다.
그렇게 몇달을 지내자 주변 사람들이 칭찬했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냐고, 너무 예쁘다고. 대수롭지 않은 듯 그냥 적당히 먹고 운동했다고 대답하곤 했다.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은 최근 독자와 기자가 함께 콘텐츠를 발굴하는 ‘입주자 프로젝트’의 주제로 ‘섭식장애’를 골랐다. 섭식장애는 정신적 문제로 먹는 행위를 통제하기 어렵게 되는 질병이다. 단순히 마르고 싶은 여자들이 걸리는 병이라고 여겨지곤 하지만, 사실은 정신질환 중 사망률이 가장 높은 축에 들 정도로 위험하다. 여성 환자가 남성보다 열 배가량 많을 정도로 젠더화된 병이기도 하다.
다양한 경로로 케이스를 수집하며 이런 경험이 너무나도 보편적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남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평소보다 훨씬 덜 먹고 혼자 있을 때 폭식과 구토를 반복한다든지, 특정한 체중에 집착하다 영양실조에 이르렀다든지… 섭식장애까지는 아니지만 체중과 체형에 대한 집착을 포함한 ‘이상섭식’을 겪는 여성들은 너무 많다. 아니 많을 수밖에 없다. 미디어에는 끊임없이 깡마른 여성의 몸이 전시되고 옷가게에는 마른 몸이 아니고서는 입을 수가 없는 ‘프리사이즈’ 옷이 널려 있다.
날씬한 몸매와 어려 보이는 외모를 갖추도록 요구하는 사회적 통제 속에서 여성들은 보편적으로 자기 신체에 대한 수치심을 느끼며 이상섭식을 겪는다. 하지만 섭식장애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은 너무 빈약하다. 섭식장애를 겪는 여성들은 흔히 ‘외모에만 집착하는 멍청한 여자애’라는 비난을 받는다. 거식증 경험을 기반으로 한 책 <삼키기 연습>을 썼고, 플랫에 섭식장애 프로젝트를 제안한 박지니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이 수십년간 섭식장애에 대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는 배경에는 가부장적, 여성혐오 문화가 있다. 섭식장애를 겪는 젊은 여성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요즘은 비만치료제 위고비 열풍이 분다. BMI 30 이상 환자에게만 처방이 허가돼 있지만 ‘위고비 성지’라고 불리는 일부 병원은 신체 계측도, 문진도 없이 위고비를 처방한다고 한다. 정상체중인 사람이 위고비를 사용하면 부작용을 겪을 위험이 더 커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성 비만율은 45.6%, 여성은 27.8%인데 위고비 등 비만치료제 처방 환자 중에서는 71.5%가 여성이다. 게다가 정상체중 여성은 정상체중 남성에 비해 마른 몸을 만들기 위해 위고비를 처방받을 가능성이 더 크다. 비만치료제 시장이 확대되는 만큼 여성에 편중된 위험도 점점 커질 것이다. 그런데도 젠더화된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영국과 프랑스 등은 패션 브랜드들이 지나치게 마른 모델을 쓰는 것을 금지한다. 최근 모델이 너무 말랐다는 이유로 영국에서 퇴출됐다는 한 브랜드의 광고 사진을 보면서, 그보다 더 마른 것 같은 K팝 여성 아이돌들을 떠올렸다. 거식증을 다룬 연극 <마른 여자들> 연습실 한쪽의 화이트보드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고 한다. 절대로 마르지 마시오. 이 연극을 연출한 박주영 연출가는 몸무게 30㎏대 거식증 환자를 연기하는 배우의 몸에 관객이 집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런 원칙을 정했다고 했다. 우리도 그 연습실처럼 안전한 공간을 만들 수는 없을까.
우리는 성공의 언어에 둘러싸여 있다. 더 좋은 직장과 더 넓은 집, 적기의 연애·결혼·출산, 취미·건강을 위한 자기계발이 좋은 인생의 기준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잭 핼버스탬의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2011)은 여기에 브레이크를 건다. 그는 실패(failure)라는 부정적 단어를 낙오가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여는 방식으로 다시 쓰자고 제안한다. 실패를 낙오가 아니라 다른 방향키로 보자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성공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균열을 내고 그 틈에서 다른 삶의 감각을 발견하자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론가로서 핼버스탬이 즐겨 쓰는 재료는 의외로 가벼운 것들이다. 애니메이션, 아동영화, B급 코미디. 그는 이런 텍스트에서 ‘정상적’이거나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궤도를 비켜 나가는 이야기를 발견한다. 성공을 향해 직선적으로 올라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목표 없이 미뤄지고 망설이고 돌아가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장난감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토이 스토리>, 닭들이 농장에서 탈출하는 <치킨 런>, 벌이 집단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꿀벌 대소동> 같은 이야기들은, 단순한 어린이 영화가 아니라 다른 시간, 다른 관계, 다른 질서를 상상하게 만든다. 정답을 향해 질주하는 영웅담이 아니라 삐걱거림을 공유하는 우정의 서사. 핼버스탬은 이런 장르를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고 저급이론(low theory)으로 종합한다. 말 그대로 고급 학문 담론의 반대편에 있는, 일상과 주변부에서 생산되는 사유를 뜻한다.
핼버스탬이 강조하는 ‘실패’는 단순히 좌절이나 무능력이 아니다. 그는 우울, 외로움, 소외, 심지어는 퇴행까지 새로운 방식의 삶을 열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그림자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을 꺼낸다. ‘주체적인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페미니즘과 달리, 자기파괴를 욕망하는 여성, 어머니와의 본질적인 유대를 거부하는 여성, 자유를 버리고 수동적이길 원하는 여성들 역시 대항 서사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지·망각·수동성·마조히즘 같은 태도도 포함된다. 핼버스탬은 이러한 태도가 단순한 패배나 회피가 아니라 다른 삶의 계보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시도라고 읽는다.
하지만 이 논의에는 몇가지 한계도 있다. 첫째, 실패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자원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실패는 선택일 수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가난, 인종차별, 장애 같은 조건 때문에 강요된 결과일 수 있다. 둘째, 실패가 퀴어나 여성의 정체성에 고정적으로 붙는 순간, 오히려 원래 실패하는 존재라는 오래된 낙인을 되풀이할 위험이 있다. 즉 실패가 특정한 정체성을 정의하는 진단적인 명칭이 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 실패를 지나치게 낭만화할 위험이 있다. 어쩌면 실패는 실패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이들만이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간과한다면 실패는 정치적 저항이 아니라 정서적 위안에 머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이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여는 문이라는 것이다. 성공이라는 언어가 하나의 길만을 가리킬 때, 실패는 그 길에서 벗어나 옆으로 나가고, 잠시 멈추고, 돌아가며 또 다른 경로를 열어낸다. 따라서 질문도 달라진다. 실패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실패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로. 실패는 낙오의 표지가 아니다. 오히려 제도의 시간을 흔들고, 그와는 다른 리듬으로 살게 하는 기회다. 바로 이 점에서 실패는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언어이자 가능성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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